프랑스 주요 도시에서 물가 상승과 공공 서비스 악화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5일(현지시간) AP·AFP·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파리와 리옹, 마르세유, 낭트 등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와 학생, 연금 생활자들이 거리로 나와 임금 인상과 생활비 부담 완화, 공공 서비스 개선을 촉구했다.
프랑스 내무부는 이날 오후 5시께 전국 시위 참가자가 약 60만명에 달한다고 잠정 발표했으나, 이후 최종 집계에서 57만5000명으로 수정했다. 이는 지난달 17일과 24일, 31일 주말 집회의 참가 인원인 55만명, 41만명, 32만명을 모두 넘어선 규모다. 평일인 목요일에 열린 집회였음에도 이전 주말보다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이다.
프랑스 국내 정보기관은 집회에 앞서 파리를 제외한 지역에서만 50만~70만명이 거리로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내무부는 이날 오후 1시 기준 파리 이외 지역에서 이미 27만명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반면 시위를 주도한 노동총동맹(CGT)은 전국 참가자가 약 160만명에 달한다고 자체 집계했다. CGT는 이번 시위를 2023년 연금개혁 반대 투쟁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계 동원으로 평가했다.
소피 비네 CGT 사무총장은 "정부가 노동계의 요구에 대한 대응을 늦출수록 해결에 필요한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며 조속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에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는 오는 9일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대표들이 참석하는 사회적 대화 회의를 열고 임금과 구매력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파업으로 교육 현장을 비롯한 공공 서비스 운영에도 차질이 발생했다. 정부에 따르면 전국 3700개 고등학교 가운데 81곳이 학생 등의 봉쇄로 정상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학생단체들은 봉쇄 또는 휴교 등의 영향으로 1000개 이상 고교에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교원 파업 참여율은 약 15.81%로 집계됐다.
중앙정부 소속 국가공무원의 파업 참여율은 정오 기준 9.89%였으며, 지방공무원과 공공의료 부문 공무원은 각각 4.60%, 3.93%로 나타났다. 주요 관광시설과 교통·에너지 부문에도 파업 여파가 미쳤다.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은 관람객 출입을 중단했고, 루브르 박물관도 일부 전시실 운영을 제한했다. 철도와 대중교통 운행이 일부 차질을 빚었으며, 원자력발전소의 전력 생산량도 감소했다.
주요 노동조합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프랑스 경제가 침체 위기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기업들의 감원 움직임도 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식료품과 연료, 가스, 전기요금, 주거비 등 생활 필수 지출은 계속 늘어나는 반면 임금과 연금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는 "사회적 불만이 크게 누적된 상황"이라며 고용과 공공 서비스, 사회·환경 문제에 대한 정부의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특히 보건·교육·우편·철도 등 핵심 공공 서비스의 운영 여건이 악화하고 있다며 인력과 예산 확충을 요구했다. 노동계는 현재 세전 시간당 12.31유로(약 1만9000원)인 법정 최저임금(SMIC)을 인상하고, 전체 노동자의 임금 수준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파비앙 빌디외 SUD철도 노조 전국 사무국장은 파리 집회에서 AP통신과 만나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와 국영 철도회사 SNCF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요구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와 철도회사 측이 합당한 조치를 내놓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간보건의료노조 소속 코린 쿠치니 씨도 "내가 근무하는 파리의 사립 병원이 인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임금 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위에 참여한 소방대원 메디 뒤몽트로티(45) 씨는 로이터통신에 "물가 상승률에 비해 급여 인상 폭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올여름 폭염과 함께 확산한 산불을 언급하면서 "대형 재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인력과 장비에 대한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파리 집회에 참가한 대학생 가랑스 블레이즈(21) 씨는 "모든 청소년과 어린이가 제대로 된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리스 마르티노비치(18) 양 역시 "취업 전망과 임금, 공공 서비스 문제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며 차기 대선에 나설 정치인들이 노동자와 청년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별 시위 현장에서도 세대와 직업을 넘어선 연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리옹에서는 학생과 노동자, 연금 생활자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등장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경찰의 최루탄과 최루액 등에 대비해 마스크와 고글을 착용했다. 마르세유에서는 'Z세대의 투쟁'을 내세운 청년들이 행진에 참여했으며, 툴루즈에서는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결정한다', '승리할 때까지 파업'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리옹 집회에 참석한 보졸레 지역의 와인 생산업자 마르탱 티베르주 씨는 AFP통신에 "노동의 대가로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을 보장받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지역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회복지사 레아 씨도 "매일 생활비를 아껴 써야 하는 현실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다양한 계층이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이번 집회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프랑스 당국은 대규모 집회에 대비해 전국적으로 약 7만명의 경찰과 헌병을 배치했다. 로랑 뉘녜즈 내무장관은 지난 주말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헬기와 드론, 장갑차 등을 동원해 주요 도심의 치안 유지에 나섰다. 전국 대부분의 집회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됐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리옹에서는 차량에 불이 붙는 등 소요가 발생했고,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해 일부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이른바 '블랙 블록'(Black Bloc) 참가자들도 경찰과 충돌했다. 파리에서는 행진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거리의 쓰레기통에 불이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브르타뉴 지역의 렌에서도 복면을 쓴 청년들이 도로를 점거하려 하고 경찰을 향해 쇠구슬을 던지는 등 충돌이 빚어졌다. 현지 당국은 이 과정에서 경찰관을 겨냥한 폭력 행위가 있었다고 밝혔다. 낭트와 포, 오를레앙, 툴루즈 등에서도 산발적인 충돌과 소요가 보고됐다.
툴루즈 인근 투르느푀이에서는 복면을 쓴 약 30명이 한 고등학교에 침입해 폭죽을 발사하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학교 내부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소방대가 출동했으며, 당국은 건물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다. 에두아르 제프레 교육장관은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이러한 폭력 행위는 어떤 주장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파리 북동부 센생드니 지역의 라쿠르뇌브에서도 고등학교 봉쇄가 진행되던 중 인근에서 15세 청소년이 흉기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용의자를 붙잡아 조사에 착수했으며, 해당 사건이 시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됐는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번 시위는 2027년 대통령선거를 약 6개월 앞둔 시점에 벌어졌다.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임금과 생활비, 공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까지 확산하면서 마크롱 행정부의 정치적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정부는 노사 협의 등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노동계와 학생들의 요구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규모 시위를 하루 앞둔 4일 국방·안보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집회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한 측근은 로이터통신에 앞으로 수주 동안 고조된 사회적 갈등을 진정시키고, 가능한 한 안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선 국면에 진입하는 것이 정부의 당면 과제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