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의 한 중견 관계자는 최근 나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HBM으로 돈 버는 걸 지금 다들 신기하게 보는데, 사실 더 큰 판은 지금 막 설계 중입니다. 낸드가 AI 메모리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 거예요.” 그 말이 이번 인사이트의 출발점이 됐다. HBM이라는 항공모함을 타고 HBF라는 이지스함의 대규모 함대 출격이라는 판단이다.
‘제본스의 역설’ — 소프트웨어가 흔들릴수록 하드웨어는 단단해진다
2026년 초 시장을 보면서 나는 흥미로운 역설을 목격했다. 나스닥의 AI 소프트웨어 섹터가 무너지는 동안 반도체 하드웨어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진원지는 앤스로픽(Anthropic)이었다. 앤스로픽이 발표한 AI 에이전트 기술이 법률, 재무, 마케팅 실무를 직접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SaaS 기업들의 존립이 흔들린다는 공포가 시장을 덮쳤다. '사용자가 개별 소프트웨어를 쓰는 게 아니라 AI 에이전트 하나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세상이 온다면,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그저 데이터 보관창고로 전락한다’는 논리였다. 단 하루 만에 소프트웨어 섹터 시총 수천억 달러가 증발했다.
여기에 빅테크들의 막대한 설비투자(CAPEX) 대비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실질 성과가 기대치를 밑돌면서 투자자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고, AI를 마케팅 도구로만 써온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걸러지기 시작했다. 가트너는 2026년 성장 전망을 보수적으로 하향했고, 미 연준의 금리 기조까지 겹치며 소프트웨어 섹터의 조정은 불가피했다.
그런데 여기서 고전경제학의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 등장한다. AI 모델의 운영 비용이 낮아질수록 더 많은 기업과 개인이 AI 서비스를 채택하고, 그 결과 추론(Inference) 수요가 폭발하면서 하드웨어와 데이터센터 인프라 수요는 오히려 더 커지는 구조다. 소프트웨어의 조정이 하드웨어에는 반사이익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외국계 증권가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삼성전자의 2026·2027년 EPS 추정치를 각각 30%, 19% 상향했고, SK하이닉스는 24%, 27%를 올려 잡았다. KB증권은 삼성전자 목표가 24만 원, SK하이닉스 150만 원이라는 숫자를 제시했다. 지금의 눌림이 오히려 진입 구간이라는 판단이 증권가 전반에 깔리고 있다.
HBF — '낸드의 반란’이 시작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HBF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다. 낸드 플래시가 AI 메모리 시장의 주인공이 된다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극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취재를 진행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마케팅 언어가 아니었다.
고대역폭 플래시(High Bandwidth Flash, 이하 HBF)의 핵심은 간단하다. HBM이 GPU 옆에서 초고속 연산을 돕는 ‘단기 기억’ 역할을 한다면, HBF는 수조 개의 파라미터를 가진 거대언어모델(LLM)을 통째로 옆에 앉혀놓고 직접 데이터를 꺼내 쓰는 ‘근접 대용량 창고’ 역할을 맡는다. 낸드플래시의 대용량·저비용 특성과 HBM의 적층 기술을 결합한 이 구조는 HBM 대비 8~16배에 달하는 초고용량을 약 40% 낮은 전력으로 구현하는 게 가능하다.
AI 추론 비용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는 이 기술에 시장이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까지 AI 서비스의 수익화를 막아온 가장 큰 장벽이 바로 추론 인프라의 천문학적 비용과 용량 한계였기 때문이다. HBF는 그 두 장벽을 동시에 허문다.
HBM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김정호 KAIST 교수는 이미 HBF 시장이 2038년경 HBM 시장 규모를 추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말의 무게감을 곱씹어봐야 한다. 오늘날 반도체 업계의 판도를 통째로 바꾼 HBM보다 더 큰 시장이 열린다는 얘기다. 2028년부터 2038년에 이르는 이 장기 레이스의 서막이 바로 지금 열리고 있다.
구체적인 타임라인을 보면 생각보다 가깝다. 2025년 8월, 샌디스크(Sandisk, 나스닥: SNDK)와 SK하이닉스가 HBF 표준화 MOU를 체결했다. 샌디스크는 2026년 하반기 16단 낸드 기반 Gen1 샘플 출시를 공식 예고했고, 2027년에는 컨트롤러까지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도 2027년 본격 양산을 목표로 로드맵을 가동하고 있다. 샌디스크의 HBF는 Gen1에서 출발해 Gen2는 1.5배 용량·1.45배 읽기 대역폭, Gen3는 Gen1 대비 2배 용량·2배 대역폭을 목표로 세대를 이어간다.
삼성·SK의 이중 전략과 경계해야 할 중국의 추격(미국의 대정부 반도체 규제를 보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단순한 '저장 장치'를 넘어 AI 연산의 핵심 파트너로 진화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기 다른 경로로 독주 체제를 굳히고 있다. 특히 HBM에서 검증된 기술이 낸드(NAND) 기반의 HBF(High Bandwidth Flash)로 전이되는 과정은 이번 인사이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의 압도적 자신감을 낸드로 확장하고 있다. 이미 2025년 4월,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 기술을 적용한 HBM3 12단 제품의 성능 테스트를 통과시키며 기술 내재화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단순히 칩을 촘촘히 쌓는 제조 역량을 넘어, 데이터 통로를 비약적으로 넓히는 패키징 노하우를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SK하이닉스의 전략은 명확하다. 샌디스크(웨스턴디지털)와 HBF 표준화 작업을 주도하는 동시에, HBM에서 쌓은 적층 노하우를 AIN(AI-NAND) 제품군으로 수평 전개하여 AI 서버용 고성능 저장장치 시장까지 통제하겠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의 반격은 '규모의 경제'와 '수직 계열화'에 기반한다. 낸드플래시 세계 1위라는 독보적 지위는 HBF 시대에 강력한 기초 체력이 된다. 삼성은 메모리 설계부터 파운드리(위탁생산), 첨단 패키징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턴키 솔루션’을 앞세워 HBM4와 HBF 시장을 동시에 폭격하고 있다.
특히 2026년 HBM 매출이 전년 대비 3배 이상 성장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이미 확충된 압도적 생산 능력(CAPA)에서 기인한다. 삼성은 GPU 업체들이 설계만 가져오면 메모리와 로직 다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원스톱 패키지'로 고객사를 록인(Lock-in)하고 있다.
중국의 추격은 더 이상 '카피캣' 수준이 아니다. YMTC(양쯔메모리)는 미국의 블랙리스트 제재 속에서도 우한에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제3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이들은 독자적인 엑스태킹(Xtacking) 아키텍처가 하이브리드 본딩과 유사한 구조라는 점을 활용해 HBF 시장 직접 진출을 선언했다.
CXMT(창신메모리) 역시 2026년까지 전체 양산 캐파의 20%를 HBM3 라인으로 전환하며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모건스탠리가 "발열과 수율 문제로 기술 격차는 여전히 3년 이상"이라고 진단했음에도, 이들의 속도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중국 정부의 무한한 보조금과 '반도체 자급률'에 대한 집념 때문이다.
다만 중국의 추격은 수율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기술력 확보는 한국 기업 기술 탈취 등을 통해 어느정도 끌어 올리고 있지만, 생산 공정의 성과는 아직 시장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반도체 활황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이슈인 만큼 계속 들여다 봐야한다.
결국 승부의 향방은 기술력과 더불어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에 달려 있다. 2025년부터 시행된 2세대 HBM 이상의 수출 통제와 첨단 노드(18nm 이하) 장비 반입 제한은 중국 기업들이 최첨단 HBF로 진입하는 데 거대한 벽이 되고 있다.
미국의 제재가 완화되지 않는 한, 한국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AI 메모리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와 '프리미엄 가격 결정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국이 범용(Legacy) 시장을 잠식하며 수익성을 갉아먹는 '빈집털이' 전략에 대해서는 한국 기업들의 영리한 포트폴리오 관리가 요구된다.
하이브리드 본딩 — '범프 없는 혁명’의 의미HBF라는 큰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토대가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이다. 이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왜 소부장 밸류체인의 주가가 다시 들썩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된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반도체 칩을 쌓을 때 쓰던 납땜 돌기(마이크로 범프)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구리 전극을 직접 맞붙인다. 이 ‘범프리스(Bumpless)’ 혁명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연결 통로인 피치(Pitch)를 이론적으로 1μm 수준(현 양산 목표는 3~5μm 수준)까지 좁힐 수 있어 데이터 고속도로의 차선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열 저항을 최대 47%까지 낮춰 AI 반도체의 고질병인 발열 문제를 정면 돌파한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기술이 아니다. 이물질 하나가 공정을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극도로 까다롭고, 수율 관리가 현재 기술로는 벅차다는 게 업계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업계는 HBM5, 즉 16단 이상의 초고단 HBM 세대부터 본격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 기술 지연이 지금 TC 본더 기반 장비 수요를 지속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고 있다.
'슈퍼을’들의 시간 — 소부장 밸류체인을 다시 그린다
이제 진짜 투자 이야기를 해보자. 이번 인사이트를 준비하면서 내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기도 하다. HBF와 하이브리드 본딩이라는 거대한 기술 파도 앞에서 어떤 기업들이 '슈퍼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티에프이 — 체질이 바뀐 기업을 지금 시장이 모르고 있다
티에프이는 이번 취재를 통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 케이스다. 사실 티에프이는 ISC가 SKC에 넘어간 이후 반사수혜를 받는 테스트 소켓 업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실상을 파고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2025년 4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509% 급증했다. 영업이익률 20%를 달성하며 반도체 장비·부품 업체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익성을 보여줬다. 더 주목할 부분은 비메모리 매출 비중이 66.6%까지 올라섰다는 것이다. 처음 상장할 때 내걸었던 비메모리 비중 50% 달성 목표를 훌쩍 뛰어넘었다.
HBF나 HBM이 아무리 흔들려도 자체적인 성장 엔진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2026년 예상 매출 구성도 보드 769억, COK 416억, 테스트 소켓 353억으로 고르게 분산돼 있다. 지금 시장이 이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티씨케이 — 낸드가 살아야 이 회사가 산다, 그리고 낸드는 살아나고 있다
HBF의 본질이 결국 낸드 플래시의 고도화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티씨케이의 수혜 구조가 명확하게 보인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SiC 포커스 링은 낸드 식각 공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소모성 부품이다. 낸드 층수가 올라갈수록, 가동률이 높아질수록 티씨케이의 매출이 뛰는 구조다.
SiC 링 매출의 70%가 낸드향이다. 2026년 삼성전자의 V9 노드(200단 후반) 전환이 본격화되면 SiC 링의 교체 주기가 짧아지고 수요가 급증한다. HBF 양산이 낸드 가동률을 추가로 끌어올리는 국면이 오면 이 수혜는 더 커진다. 케이엔제이 등 경쟁사의 추격이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티씨케이가 TEL과 구축한 파트너십 구조는 단기간에 무너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배적 공급자의 지위는 유지될 것으로 본다.
그 밖에 레이더에 기억해야할 기업들 (증권업계 시각 정리)
▲케이엔제이는 티씨케이의 대안이자 보완 픽이다. 같은 SiC 소재 시장에서 티씨케이 대비 약 50% 할인된 밸류에이션으로 거래되고 있다. 낸드 고단화 수혜는 동일하게 받지만 파트너십 구조에서 차이가 있다.
▲샌디스크(SNDK, 나스닥) 는 2025년 웨스턴디지털에서 분사한 순수 NAND·SSD 전문 기업이다. HBF 표준의 공동 설계자이자 첫 샘플을 내놓을 주인공이다. 국내 소부장이 아닌 HBF 수혜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해외 종목을 찾는다면 이 회사가 1순위다. AI 인프라 성장에 가장 노골적으로 노출된 종목이기도 하다.
이 레이스, 이제 막 출발선을 넘었다
인사이트를 마치면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HBM은 정말 예고편에 불과했는가. 취재를 마친 지금, 결론이 나온다.
HBF는 AI가 데이터센터의 높은 담벼락을 넘어 실제 비즈니스의 현장으로 들어오기 위한 '경제적 해답’이다. 화려한 HBM의 뒤편에서, 지금 HBF는 실질적인 AI 수익성의 퍼즐 마지막 조각을 채워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HBF는 낸드 사업을 '미운 오리’에서 '전략적 자산’으로 바꾸는 마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생태계 안에서 하이브리드 본딩과 고단화 낸드 공정의 핵심을 틀어쥔 소부장 기업들은 단순한 실적 개선을 넘어 기업 가치의 질적 도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27년 HBF 양산 원년, 그리고 2038년 HBF가 HBM 시장을 추월하는 그날까지. 이 긴 레이스의 출발 총성이 지금 막 울렸다.
별책 부록 - 경쟁 기술 지형, HBF 혼자 달리는 게 아니다취재를 하다 보면 종종 "그럼 CXL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맞는 지적이다. HBF가 유일한 해답이라는 식의 서술은 균형을 잃은 것이다.
CXL(Compute Express Link)은 D램 기반으로 메모리 풀을 확장하는 기술이다. 삼성전자가 2026년 CXL 메모리 모듈을 대규모 공급하기 시작했다. HBF가 낸드 기반으로 '용량’을 극대화한다면, CXL은 D램 기반으로 '대역폭’을 확장한다. 지금은 둘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지만, 중장기적으로 일부 시장에서 경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 마이크론의 소캠(SOCAMM)은 엣지·온디바이스 AI 메모리 포지션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HBF는 이 지형 속에서 '추론 인프라의 대용량 저장 문제’를 푸는 가장 명확한 해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투자 유의사항 : 본 인사이트는 취재를 바탕으로 한 분석 의견이며, 투자 손익의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HBF 양산 일정 변동, 중국의 기술 추격 속도, 하이브리드 본딩 수율 개선 여부, 예스티 특허 소송 진행 상황 등은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한 변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