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아랍에미리트(UAE) 인공지능(AI) 기업 G42의 중국 유착을 끊어내고 미국산 반도체를 공급한 막후 작전이 드러나면서 첩보와 외교, 산업 정책이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CIA가 UAE 소재 AI 업체 G42를 대상으로 은밀한 공작을 벌여, 이 회사가 중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미국산 최신 AI 칩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2023년 CIA 소속 요원 조니 개넌이 아부다비로 파견됐다. 그는 UAE 국가안보보좌관 겸 대통령 친동생인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 소유의 G42가 중국 측과 어떤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미국 당국은 해당 기업에 AI 반도체를 넘겨줄 경우 자국의 핵심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품고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학업을 마친 펑 샤오 최고경영자(CEO)의 이력이 워싱턴의 의구심을 키웠다.
펑 씨는 2015년 아부다비 기반의 보안 업체 다크매터에서 AI 프로젝트를 이끈 바 있다. 미 검찰 조사 결과 이 회사는 과거 미국 국가안보국(NSA) 출신 해커들을 끌어들여 반체제 인사와 기자들을 은밀히 추적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펑 씨 산하 부서는 중국 국적자를 대거 채용하고 중국 본토에 지부를 두었을 뿐 아니라, 화웨이와 손잡고 도심 모니터링용 AI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도 했다. 이후 2019년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다크매터는 해체됐고, 펑 씨가 이끌던 조직만 분리돼 오늘날의 G42로 재편됐다.
주UAE 미국대사관 직원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활동한 개넌은 G42 내부를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워싱턴의 경고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며 친중 노선 철회를 압박했다. 결국 G42 측은 1억5000만달러(약 2070억원)어치에 달하는 화웨이 통신망을 철거하고, 규정 이행 여부를 점검할 외부 감사인을 두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G42가 여전히 중국 국영기업들과 물밑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개넌은 실무진 차원의 독자적 움직임일 가능성이 크며, 펑 씨가 양국 간 합의를 고의로 훼손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악관을 비롯한 미 행정부 안팎에서는 UAE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자국 기업들의 AI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적극론과, 첨단 기술이 친중 성향 국가로 유출돼 미국의 안보 우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신중론이 맞섰다. 이 같은 내부 갈등은 2024년 6월 버지니아주(州) 맥클린에 위치한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의 저택에서 열린 비공개 회동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펑 씨는 중국 업체 딥시크의 가파른 성장세를 거론하며, G42와의 협력을 거부할 경우 중국의 AI 굴기가 미국의 주도권을 위협할 것이라고 강하게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7개월 뒤인 2025년 1월 딥시크의 새로운 AI 모델이 공개됐고,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임기를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 UAE가 엔비디아의 첨단 칩을 조건부로 수입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WSJ은 이 같은 정책 결정이 UAE로 하여금 중국산 기술을 배제하고 미국 쪽으로 돌아서도록 만든 핵심 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UAE의 미국산 AI 반도체 조달 경로는 한층 넓어졌다. 2025년 5월 추진된 대형 인프라 구축 사업인 스타게이트 UAE 프로젝트를 계기로, G42는 오픈AI·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들과 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한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어 미 상무부가 같은 달 10일 대(對)UAE AI 반도체 수출 규제를 대폭 완화함에 따라, G42는 향후 최소 9개월간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산 칩을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게 됐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하얀 측이 트럼프 가문 소유의 암호화폐 벤처 월드리버티파이낸셜에 5억달러(약 6900억원)를 투자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이해충돌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백악관 측은 이를 일축했다. WSJ은 이번 사안을 조명하며 "첨단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무대 이면에서 첩보 기관의 공작과 국가 간 외교, 상업적 로비가 복잡하게 얽힌 새로운 회색지대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짚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