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을 비롯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의 장기 국채금리가 수십 년 만의 최고치를 경신하며 전 세계 채권시장에서 투매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각국의 재정 지출 확대와 이에 따른 국채 발행 물량 증가 우려,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대형 기술기업들의 대규모 회사채 발행까지 맞물려 장기물 금리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1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날 장중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5.33%까지 올라 2007년 이후 19년 만의 고점을 경신했다. 전 세계 금리의 지표로 쓰이는 미 10년 만기 국채금리 또한 연 4.75%에 도달해 19개월 만의 고점을 넘어섰다. 일본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장중 연 2.945%를 기록하며 1996년 이후 30년 만의 최고치를 썼고, 독일과 프랑스의 장기 국채금리 역시 각각 2011년, 2008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통상 장기물 금리가 이처럼 급등하는 현상은 시장 참여자들이 각국 정부의 재정 건전성 악화를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중동 사태 장기화에 따른 물가 상승 압력과 각국의 재정 확장 정책이 국채 공급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채권 매수자들이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 이 같은 장기물 금리 급등세가 가뜩이나 빠르게 늘어나는 국가부채의 이자 상환 부담을 가중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워싱턴포스트(WP) 보도에 따르면 미 재무부 기준 전날 국가부채 규모는 39조9000억달러(약 5경6000조원)로 파악됐으며, 이번 주 중 40조달러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미국 의회 산하 의회예산국(CBO) 추산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의 올해 국채 이자 지출액만 1조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미 국방부 전체 예산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재정 지출 확대에 따른 후폭풍은 미국 외 주요 선진국들의 장기물 금리를 끌어올리는 핵심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내수 진작용 재정 확장 정책이 재정 악화 및 국채 공급 급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감이 팽배하다. 유럽 대륙 역시 경기 침체 국면 속에서 재정 압박에 대한 불안 심리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AI 열풍도 전 세계 채권 투매 현상을 부추기는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같은 대형 빅테크들이 엔비디아 AI 칩 확보와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회사채로 조달하면서, 시장 유동성을 놓고 국채와의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투자은행 바클레이스는 최신 분석 보고서에서 빅테크들의 AI 인프라용 회사채 물량이 급증하는 데다 만기마저 10년 이상으로 길어지는 추세라며, "올해 시장 판도를 바꾼 핵심은 AI 기업들의 자금 조달 규모와 장기화된 만기"라고 짚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장기물 금리 상승세가 쉽사리 진정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캐피털닷컴 소속 다니엘라 해선 시장분석가는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완화, 연준의 금리 인하 기조가 단기물 금리 하락을 유도할 여지는 있다"면서도 "장기물은 쏟아지는 국채 물량과 재정적자 확대, AI 회사채 급증, 에너지 및 물가 불안 등 복합적인 악재에 둘러싸여 있다"고 평가했다.
장기물 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소비자 대출 금리를 연쇄적으로 끌어올려 서민들의 주거비 및 생계비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 된다. 미 장기채 금리가 추가 상승할 경우, 11월 미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측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미 국채시장에 대한 과도한 비관론은 이르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야데니리서치는 "당장 공포 스위치를 켤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정부의 방만한 재정 지출에 항의하며 국채를 투매해 금리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채권 자경단이 언제 움직일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