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카메룬 야운데에서 열리는 제14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MC-14)를 앞두고 전면적인 체제 개편을 촉구하는 개혁 보고서를 23일(현지시간) 전격 공개했다.
USTR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현행 WTO 중심의 글로벌 무역 질서는 더 이상 옹호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강도 높은 쇄신을 주문했다. 특히 낡은 '선진국 대 개발도상국'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글로벌 무역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점을 강하게 질타했다.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 이미 상당한 발전 수준에 도달한 국가들이 여전히 개도국 지위를 고수하며 부당한 혜택을 누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다.
무역 체제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도국 특혜(SDT) 자격 요건부터 전면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핵심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구체적인 국가명까지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을 비롯해 브라질, 싱가포르, 코스타리카 등 4개 WTO 회원국은 2019년 3월부터 2020년 3월 사이 향후 무역 협상 과정에서 개발도상국 특혜(SDT)를 내려놓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여전히 자신들을 개도국으로 분류하고 있다며 모순을 지적했다. 또한 중국이 2025년 9월 향후 WTO 협상 시 SDT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대목을 두고도, 겉보기엔 미국의 쇄신 요구에 부응한 듯하나 그 진정성에 의구심이 든다며 불신을 드러냈다.
이러한 맥락에서 USTR은 SDT 제도가 본연의 취지를 되찾으려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정해진 통보 규정을 준수하는 회원국에는 확실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WTO의 핵심 가치인 최혜국대우(MFN)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상호주의 원칙과 MFN의 관계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문건 공개와 동시에 발표한 입장에서 “글로벌 무역 패러다임이 상호주의 및 균형을 핵심으로 삼아 재편되고 있다”며 “WTO가 시대적 적합성을 유지하려면 혁신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은 이번 문건을 토대로 회원국 주도의 쇄신 논의를 활성화할 실질적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주도하는 관세 장벽 강화로 글로벌 보호무역 기조가 짙어지면서 다자간 무역 질서의 구심점인 WTO는 심각한 존립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번 각료회의를 통해 도출될 결론이 WTO의 위상과 기능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편 한국은 2019년 10월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에 직면했을 당시, WTO 내 개발도상국 지위는 유지하되 향후 협상에서 주어지는 실질적 특혜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확정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