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반도체 설계 자산(IP) 전문 기업 Arm이 단순한 설계도 판매처를 넘어 직접 AI 반도체를 제조·판매하는 '종합 실리콘 기업'으로의 역사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동안 애플, 삼성전자,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에 설계를 빌려주고 로열티를 받던 비즈니스 모델(BM)에서 벗어나, 완제품 칩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수익성을 극대화하겠다는 승부수다.
24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Arm은 최근 차세대 데이터센터용 AI 칩인 ‘Arm AGI CPU’를 전격 공개했다. 이번 신제품 출시를 기점으로 Arm은 연간 매출 규모를 수십억 달러 이상 추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설계도 한 장에 몇 달러는 옛말"... 칩 한 개에 '수천 달러' 노린다
Arm의 이번 변신은 반도체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기존의 Arm은 고객사로부터 칩 한 개당 수 달러 수준의 로열티를 받는 데 그쳤다. 반면 직접 칩을 설계하고 제조해 판매할 경우, 개당 수천 달러에 달하는 판매 수익을 온전히 챙길 수 있게 된다.
시장은 이러한 Arm의 체질 개선이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그리는 'AI 제국' 건설의 핵심 퍼즐이라고 분석한다. 단순히 기술을 지원하는 조력자 역할에서 벗어나, AI 연산의 심장부인 CPU 시장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다. Arm은 이번 AGI CPU가 시장에 안착할 경우, 현재 매출 규모를 단기간 내에 두 배 이상 성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Arm AGI CPU'는 사양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Arm의 최신 아키텍처인 '네오버스 V3(Neoverse V3)' 코어를 최대 136개까지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대만 TSMC의 최첨단 3나노(nm) 공정에서 양산될 예정이다.
기술적 핵심은 '전성비(전력 대비 성능)'에 있다. 기존 데이터센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x86 기반 플랫폼과 비교했을 때, 서버 랙(Rack)당 성능은 2배 이상 향상된 반면 전력 소모량은 300W(TDP) 수준으로 묶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이는 특히 단순한 텍스트 생성을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 워크로드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는 평가다.
◇메타·SKT와 손잡고 '반(反) 엔비디아 전선' 구축..K-반도체 생태계에 미칠 파장은
Arm의 이 같은 행보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즉각 응답했다. 페이스북의 모기업인 메타(Meta)는 설계 단계부터 Arm과 긴밀히 협력해온 핵심 파트너다. 메타는 자사 데이터센터의 운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Arm 기반의 독자 칩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오픈AI(OpenAI)와 클라우드플레어(Cloudflare), 그리고 한국의 SK텔레콤이 초기 고객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Arm의 우군으로 합류했다. 특히 SK텔레콤의 참여는 국내 ICT 기업들이 엔비디아 GPU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낮추고, 저전력·고효율의 Arm 기반 인프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이번 발표를 기회와 위기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Arm의 고성능 CPU 판매 확대가 반가운 소식이다. 이러한 고성능 칩에는 대량의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차세대 D램이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더욱 폭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서는 고심이 깊어질 전망이다. Arm이 첫 양산 파트너로 TSMC를 선택함에 따라, 첨단 공정 수주를 노리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에겐 강력한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삼성전자는 공급망 다변화의 기회를 잡아야할 것으로 예상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AI 칩 시장 자체가 급격히 커지고 있어, 향후 공급망 다변화 과정에서 삼성전자의 3나노 GAA 공정에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Arm은 올해 하반기부터 이 칩의 본격적인 양산과 공급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시장의 표준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