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빅테크 우군과 손잡은 애플이 마침내 고도화된 음성 비서 시스템을 선보이며 프라이버시 보호를 차별점으로 내세웠으나, 업계 선두 주자들을 압도할 만한 결정적 승부수는 부재했다는 냉정한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애플이 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쿠퍼티노에 위치한 본사 '애플파크'에서 열린 연례 세계개발자회의(WWDC) 기조 발표를 통해 구글의 제미나이 모델을 접목한 음성비서 '시리AI'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2년여간 지연됐던 인공지능(AI) 기능의 대대적인 개편을 마침내 단행한 것이다.
이번에 도입된 시리AI는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이전에 나눈 대화·이메일·사진 등의 맥락을 이해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외부 정보까지 활용해 적절한 답변을 제공한다. 나아가 사용자를 대신해 달력에 일정을 등록하거나 '미리 알림' 앱에 할 일을 추가하는 등 보다 능동적인 작업 처리 능력을 갖췄다.
지인이 보내준 새 이사 주소를 저장하지 못했을 때 문자메시지 내역을 검색해 찾아주기도 하며, '지난주 목장 여행 때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지시하면 사진첩에서 해당 조건에 맞는 결과물을 제시한다. 대화 내용이 일회성으로 사라졌던 기존 방식과 달리 챗GPT나 제미나이 등 대화형 AI 모델처럼 이전 대화 목록을 보존할 수 있게 됐으며, 이 목록은 아이클라우드를 통해 사용자의 모든 애플 기기에 동기화된다. 시리의 감정 표현 수준과 발화 속도를 개인 선호에 맞게 설정할 수 있으며, 음성 받아쓰기 시 철자 및 구두점 인식 정확도도 대폭 향상됐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활용하는 '시각 지능'(비주얼 인텔리전스) 기능도 탑재됐다. 음식을 비춰 영양 정보를 확인하거나 영수증을 촬영해 동행인들과 각자 먹은 메뉴의 금액을 정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AI 기능은 주요 앱 전반에 걸쳐 적용됐다. 항공사에 전화해 비행편을 변경하려 할 때 통화 내용을 인식해 이메일함에서 예약 코드 등을 자동으로 추출하거나, 가정용 카메라가 동작을 감지했을 때 상황을 분석해 '택배가 왔다'고 알려주는 방식이다.
애플은 시리AI가 아이폰 등 기기에 저장된 이용자 정보를 활용하면서도 개인정보를 철저히 보호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크레이그 페더리기 수석부사장(SVP)은 대부분의 AI 제공업체가 데이터 보호 책임을 사용자에게 전가하는 반면, 애플은 온디바이스 AI 및 비공개 클라우드를 통해 애플을 포함한 누구도 이용자 데이터에 접근하거나 저장할 수 없도록 차단했다고 설명했다.
처리 성능도 한 단계 향상됐다. 차세대 아이폰 운영체제(OS)인 'iOS27'과 '골든게이트'(금문교)라는 이름의 맥OS는 '중앙처리장치(CPU) 스케줄러'를 적용해 성능을 높였으며, 필요한 데이터를 미리 불러오는 방식으로 앱 실행 및 사진 로딩 속도를 개선했다. iOS27은 2019년 출시된 아이폰11까지 지원해 구형 기기 사용자도 이러한 개선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
시리AI는 이날부터 개발자용 시험판 OS에 적용되며, 일반 공개는 올가을에 이뤄진다. 다만 상당수 기능은 영어로 우선 출시한 뒤 지원 언어를 순차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유럽연합(EU)과 중국에서는 디지털시장법(DMA) 및 현지 규제로 인해 출시가 지연될 전망이다.
이날 15번째이자 마지막 WWDC 기조 발표를 진행한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애플은 언제나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지향해왔다"며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날 발표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2년 전 같은 자리에서 예고했던 기능을 뒤늦게 적용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애플은 AI 모델 부문에서 경쟁사에 뒤처진 상황에서 당시 예고했던 기능의 출시를 미뤄왔으며, 이번에 구글의 AI 모델을 통합한 이후 본격적인 적용에 나선 셈이다.
시장에서는 애플의 이 같은 선택을 실용주의적 결정으로 평가하면서도, 이용자들이 기대했던 '새로운 한 방'(One more thing)이 없었다는 점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